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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병욱 개인전

    Oh Beung Ouk Solo exhibition

    <Juridical Pharmakon>

    2025.5.27 ~ 2025.6.7

    I. 형태는 필치와 함께 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정확한 형태와 중첩하는 빠른 필획들이 주가 되는 그림들에서 색채는 2차적이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공감 혹은 감동은 작품의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물어보면서부터 색채의 중요성을 알아가고 있다. 즉, 그림은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형태와 감성에 기반한 색채의 합인데, 데셍은 이성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감성을 뒤흔드는 강렬한 감동을 주기 어렵지만, 감성적인 색채를 사용할 때 감동의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상의 윤곽선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도 시각적 이성 활동이고, 화면의 공간을 설정하는 것도 이성 활동이어서, 형태가 조금만 어긋나도 시각이 감지하고, 공간 구성이 조금만 틀어져도 냉정한 이성이 틀렸다고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뜨거운 감동을 받기보다는 대상의 실제와 비교하면서 차가운 평가를 하게 된다.

     반면, 색채는 이성의 인식과 통제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감성으로 느껴진다. 색채는 음악처럼 이성을 통하지 않고 가슴으로 직접 전해져서 마음의 거문고,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감 튜브나 페인트통의 색들을 보고 감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색채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과제가 앞에 있다.

     색채는 감성의 영역이라는 판단은 매우 오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파르마콘 Pharmakon 은 화가의 색채였다고 한다. (“화가의 색채를 지칭하는 희랍어 pharmakon 파르마콘 또한 마법의 묘약을 상기 시켜 주지 않는가“ (쟝 라코스트,  La philosophie de l’Art, 예술철학, 김인환 역, 탐구당,  p.27)

     “몽혼약 같은 색채, 파르마콘”. 고대 그리스어에서 실제 그렇게 사용했던 단어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당시의 일화들을 보면 개연성이 매우 높다.

     아펠레스, 제욱시스, 파라시오스 등의 거장들은 이미지를 실물로 착각하게 할 만큼 사실적인 작품을 추구했었다. 대상의 음영을 그리는 스키아그라피아 기법, 즉 명암법으로 완벽함을 추구하면서 그린 이상적인 형상들이 이성적이라면, 형상들을 칠한 몽혼약 같은 색채는 감정적이다. 고대 그리스의 거장들은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형태들로 감상자들의 시선을 빼앗고, 몽혼약 같은 색채    물감으로 그들을 감동시켰다.

    고대 그리스어가 기원인 이 pharmakon은 라틴어에서 약 혹은 독을 칭하며, 우리에게 pharmacy 약국이라는 단어를 주었다.

    예술 작품의 가장 큰 역할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카타르시스, 정화였다. 극장에서 극도의 비극을 겪은 후 해소되는 개인적인 불안과 초조, 공포와 두려움, 정신적인 고통을 치료하는 약. 카타르시스는 감동 이후에 오는 것이고, 우리가 미술 작품들에서 감동적인 요소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형상보다는 색채에 더 많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II. 표지화는 음계 컬러 스케일이다. 백색광을 무지개색으로 분광한 물리학자 뉴턴은 1704년 색에 음계를 부여하였다. 도레미파솔라시도에 순서대로 빨주노초파남보. 이후 여러 학자들이 필요에 따라 다시 만들었는데, 각자의 이유에 따라 다르고, 내가 정한 것도 다르다.

    음계는 무거운 음에서 점점 가볍게 올라간다. 색의 무게는 한눈에 보이지 않아서, 흑백 그라데이션을 만들고 색들을 맞춰 보니, 파랑이 제일 무거워서 도, 빨강이 미, 노랑이 라가 되었다. 빨주노초파남보가 파보빨주황노초가 되었다. 간단한 개념도를 가지고 Musimage 팀원 이다정이 상세 칼라스케일을 만들었다.  Team Musimage는 이 표를 기초로 해서 베토벤의 5번 교향곡과 리스트의 캄파넬라를 LED 대형 스크린에 구현되도록 하였다. 그 일부는 2023년과 2024년 그룹전에 발표했다.

     보이는 음악! 연주의 진행과 동시에 화면을 색면, 색도형, 색채 구성으로 실현 가능하게 한 것은 디지털 코딩이다. 팀원 이관규는 저작권 때문에 해당 곡을 직접 연주하고, 사운드 파일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했다. 이 작품들은 작은 스마트폰에서 볼 수 있지만, 요즘 빌딩 전체를 덮기도 하는 LED 패널 위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감동은 크기에 비례하고, 엄청난 크기는 질문을 줄이니까. 그런데 이 공동 작업은 1 년 이상 멈춰있다. 무보상의 예술의 운명일 수도 있다.

     보이는 음악은 한편으로는 미술이 음악에 종속되는 약점을 드러내었다. 음악 연주의 진행과 동시에 진행되는 활성화된 색면들은 분명히 새로운 경험이고, 공감각적인 감상이고, 그 곡에 대한 감상을 풍부하게 하지만, 음을 제거하면 색면 추상 동영상 미스테리가 된다.

     고상한 이야기를 재현하다가 순수미술로 독립한 모더니즘이 이제 와서 다시 음악의 보조가 될 수가 있을까? 음의 향연을 정지된 하나의 화면에서 선과 색의 향연으로 바꾸는 것이 정당하지 않을까?

    음악의 감동을 색채로 표현하였던 칸딘스키와 클레 등의 화가들을 보면서, 컬러 스케일에 기반하여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한 화면에 그려본 것이 작품 B-n5이고, B-n5를 변용한 것이 작품 Color stripes 이다.

     

    III. 색채와 형상은 미술의 기본 요소이어서, 작가들에게 가장 큰 의문과 도전의 대상이다. 작품은 그래서 형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양분할 수도 있다. 대다수의 감상자들에게는 그림 속으로 안내하는 형태가 필요하다. 형태는 영상, image인데, 影像은 그림자이니 실물이나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형태는 화면 위에 그려진 가상 이미지여서 캔버스라는 실체, 물감이라는 실체와는 존재 방식이 다르다. (모더니즘의 많은 부분은 이 기초 위에 서있다.)

     그런데 색채라는 실체만 있는 그림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렇다면 색채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과거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형태들이 illusion 가상에 불과하니, 추구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작가들이 추상주의자들과 추상 표현주의자들이다. 순수미술의 종착지점이다. 그림의 실체는 표면과 물감층이고, 모든 추구를 이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그들은 각자 색채를 그들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캔버스 위에 있게 했다. 중첩해서 뿌려대거나, 캔버스 전체를 도포하거나, 캔버스 천 조직으로 스며들게 하거나, 띠줄무늬로 색채를 강조하거나 ….

     그들이 색채를 작품 안에 주체로 존재하게 하는 혁명적인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결과로 화면에서 형상은 쫓겨났고, 형상의 추구는 정지되었었다. 그 성과는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이고 진실된 답을 얻은 것이지만, 작품들은 그다지 풍성했다고 할 수 없다. 물감의 농담의 차이와 거칠기의 차이, 물감층 두께의 차이나 변화로 갈 수 있는 곳은 매우 제한되기 때문이다. 

     

    IV. 물감층이라는 그림의 실체 위에 끌어들일 수 있는 가상 이미지의 종류와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전기 모더니스트인 인상주의자, 입체주의자들은 형태를 부수면서 평면에 도달하려고 했고, 후기 모더니스트들은 선들이 형태를 완성하지 않는 선까지만 그리면서 평면을 유지했다. 나의 가장 큰 의문과 걱정은 가상인 형상과 실체인 물감이 어느 선에서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색채는 형태의 선들을 통해 생명을 얻고, 선들은 색채를 통해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데, 어느 지점에서는 둘 모두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감동한다’ 혹은 ‘심금을 울린다’는 표현은 롤랑 바르트의 풍쿠툼 punctum, 즉 ‘찌름’과 동일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찌르는 감동은 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마음에 있다. 감상자가 유사한 경험을 겪었어야 공감의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동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두 문장이 있다. 마크 로스코의 유명한 인용구, "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느낀 것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The people who weep before my pictures are having the same religious experience I had when I painted them.). 그에 따르자면 눈물을 흘릴 만큼 강한 감동은 색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압도적인 감동은 크기에 비례한다. 그는 또한 “내 작품은 아주 근접해서, 45cm 거리까지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작품의 크기를 키우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300x200cm 작품, 주황색 사각형으로 가득 찬 작품을 코앞에 두고 본다고 하자. 그러면 표면은 사방으로 멀리 펼쳐진 주황색 황혼으로 보일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칠해지고, 흐르고, 스며들기도 하는 주황색 물감의 물질적인 성질도 보일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감상자가 보는 것이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할 만큼 드넓은 황혼이었을 것이다. 한정된 크기의 작품 한 점에서 느끼는 감동은 하늘을 보는 감동으로 증폭될 것이기 때문이다.

     

    V.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하늘을 주제로 했는데, 진정한 주제는 색채이다. 이성은 그 색채가 왜 거기에 있냐고 물어본다. 백색광은 대기 중의 다종의 미세한 입자들을 통과하면서 모든 색으로 산란된다. 이때 구름의 형상은 색채를 끌어들이기 위한 좋은 핑계거리다.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변화무쌍한 형태이며, 햇빛의 각도와 강도에 따라 무한으로 변화하는 색채들의 수용체이다. 하늘과 구름과 햇빛이 만나서 생기는 모든 색들을 몸체가 있는 색채물감으로 화면에 옮겼다. 그림은 무게도 부피도 없이 사라지는 빛들을 모방한 것인데, 빛들은 캔버스 위에 필치가 쌓은 물감층으로 육화(肉化)되었다.

    감동은 감상자의 경험에 따르는데, 작품의 최종 완성자는 감상자이다. 작가의 대상은 작품 제작의 계기가 되고, 작품은 감상자 감상의 계기가 된다. 감상자는 작가가 나누고자 하는 감동의 공감자이며, 작가는 감상자를 위한 새로운 것의 탐색자이고, 이 모두는 즉 대상과 작가와 감상자가 함께 사는 예술 세계를 구성한다.

     개의 꼬리 : 작년 12월 3일부터 이 전시 개막일 다음주 6.3 대선일까지 꼬박 여섯 달이다. 그간 앞날에 대한 공포가 수많은 신종 병적 증상들을 만들었고, 누구라도 그것들로 인해 고통받았다.  이번 전시 작품들의 제작도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감상자 각 개인의 경험에 따른다는 롤랑 바르트의 “찌름”이라는 공감이 예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구현을 위해 사실만을 규명해야 하는 사법체계에서도 사적으로 오용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감이 있다는 것이다. 시민의 자유와 평등, 권리와 의무를 지키기 위한 헌법이 존재하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피의자가 누구냐에 따라 정의의 척도는 왜곡되어 왔고,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확인되어가는 중이다. 현실이 상상을 초월할 때, 상상은 현실이 되고, 세계는 붕괴되어 뒤섞인 난장판이 된다. 분명히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그래서 원래의 전시제목에 형용사를 하나 더해서 Juridical Pharmakon을 제목으로 삼았다. 법률적으로 정의된 색채. 약국에서 약 혹은 독, Pharmakon을 다루는 약사가 환자를 위한 일꾼인 것처럼, 법원에서 법을 다루는 법관은 법원의 존엄한 권력자가 아닌 것임을 기록하기 위해서.

            2025년 찬란한 5월에 

    작품 이미지

    장필교, 신필균 초대전

    <보통 사람들의 초상>

    2025.6.10 ~ 2025.6.21

    전시 소개

    미앤갤러리는 오는 6월 10일(화)부터 6월 21일(토)까지 장필교, 신필균 초대전 <보통 사람들의 초상>을 개최합니다. 이번 2인전에서는 두 작가가 각자의 시선으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장필교 작가는 관절 목각 인형과 비현실적으로 작은 사람들을 통해 현대 사회 속 인간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표현합니다. 여러 상황 속에 놓인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목각 인형과 작은 인물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투영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한편, 신필균 작가는 ‘타호’라는 존재를 통해 타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타호’는 작가가 사람을 단순한 형태로 표현하여 모든 작품에 등장시키는 인물입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타인이기에 작가는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도 ‘타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관람객이 ‘타호’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을 갖길 희망합니다.

    서로 다른 접근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두 작가의 시선이 교차하는 자리에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작품 이미지

    최정은 초대전 <바다와 자아성찰> 24.9.12~9.28
    소유자032024-09-25
    아일렛솔 초대전 24.8.27~9.10
    소유자082024-09-19
    박동진 초대전 <우주 거닐기> 24.8.10~8.23
    소유자092024-08-28
    권기동 초대전 24.7.26~8.8
    소유자0102024-08-08
    미앤갤러리 소장품전 24.7.6~7.23
    소유자0192024-07-20
    노경화 초대전 <다정함에 관한 단편집> 24.6.21~7.14
    소유자0162024-07-12
    권여현 초대전 24.5.29 ~ 6.18
    소유자0292024-06-11
    오병욱 초대전 <화가의 정원> 24.4.27 ~ 5.23
    관리자041202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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